풍운아 황운하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허준영과 조현오

서형 작가 | 기사입력 2018/04/13 [22:53]

풍운아 황운하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허준영과 조현오

서형 작가 | 입력 : 2018/04/13 [22:53]

 

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제4화. 외시 출신 경찰청장

 

2003년, 황운하는 서랍을 정리하다가 누렇게 된 대학노트를 발견했다. 20년 전 경찰대 재학시절 사용했던 노트에는 경찰관으로서 목표 세 가지가 적혀 있었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 경찰수사권 독립, 경찰기구 독립이다. 경찰은 수사권 독립을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전제로 여긴다.

 

황운하는 1984년, 4학년이 됐을 무렵 경찰 조직이 떠안은 숙제 해결을 경찰이 존재하는 이유로 삼겠다고 생각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벌어지고,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1988년 1월 28일, 경찰대 졸업생 및 재학생들이 모여 성명을 발표한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천명하는 ‘경찰중립화선언’이었다. 황운하를 포함한 주동자들은 서울지방경찰청장실에 모두 불려갔다. 더는 집단행동을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황운하는 이듬해 1989년 종암서 장암파출소장으로 부임한다. 80년대 학생들은 전두환 사퇴를 외치며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곤 했다. 1980년대 파출소에는 시위자를 검거하려는 주재형사가 상주했다. 당시 황운하와 함께 근무한 주재형사는 지금 어느덧 노인이다. 그도 황운하가  전 해에 큰일을 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찰 고위층은 파출소장 찾는 전화를 종종 걸었다. 주재형사는 이런 명령도 받았다.

 

“소장 다른데 못 나가게 붙잡아두세요.“

 

당시 황운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경찰 조직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좋지도 않았지만, 이 조직에서 성장한다는 느낌도 없었다.

 

 

주재형사도 당시 20대 황운하는 경찰 선택을 조금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린 황운하에게 사주를 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잘 아는 철학관에 미리 가서 이렇게 당부했다.

 

“내일 파출소장 모시고 올 테니까 사주에 관운이 붙었다라고 이야기해주라.”

 

주재형사는 황운하가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황운하를 포함한 경찰대 1기생들이 1987년부터 경찰에 유입되면서 조직 청렴지수가 높아졌다. 수사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은 1990년대에는 경찰대 졸업생을 대거 조사계에 투입하면서 청렴성을 요구하는 사회 흐름과 맞물리게 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조직이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기존 문화와 타성에 젖은 상사가 있기 마련이다.

 

황운하가 형사과장이던 시절 야간에 신고가 들어오면 직접 출동하는 서장이 있었다. 서장은 자신이 출동할 때마다 형사과장도 호출했다. 황운하는 호출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일은 야간 당직반장 담당입니다. 낮에 정신을 집중해 사건 기록을 검토해야 하니 못 나갑니다."

 

이런 일이 몇차례 반복되자 서장은 과장들이 다 모인 오전 회의에서 불편한 마음을 내비쳤다.

 

“형사과장, 어제 서장이 나오라고 한 지시 전달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전달받았습니다."

 

“왜 안 나왔나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나갈 사건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낮에 일을 못합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지 중요하지도 않은 일까지 쇼맨십 부리 듯 하면 일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나와 일 못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과장들이 황운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서장은 즉시 서울지방경찰청에 황운하가 항명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황운하는 곧 다른 경찰서 형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처럼 참모로서 황운하를 내켜 하지 않는 서장도 있었지만, 어떤 서장은 황운하를 '경찰대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제1호'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경찰대 출신들이 조직을 위해 목소리를 낼 때마다 그 중심에 황운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황운하는 경찰대 총동문회장을 지냈다.

 

당시 정치권은 대우부평자동차 진압 사태 책임을 경찰청장인 이무영에게 물어 퇴진을 요구했다. 경찰대 총동문회장이었던 황운하는 회의를 열고 최종 견해를 언론에 밝혔다. 정국 수습을 노린 청장 퇴진 요구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보도는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확산됐다. 언론은 경찰청장을 보호하고자 경찰대 출신이 나섰다고 봤다. 보도가 확대되자 황운하가 수습해야 할 상황이 됐다. 경찰청장 관련 사안인 만큼 경찰 고위간부는 모두 언론사로 총출동해 읍소했다. 언론이 갑이고 경찰이 을이었던 시절에도 기자에게 대드는 경찰은 황운하 뿐이었다.

 

당시는 기자들이 사건 특종을 놓치면 경찰에 화풀이하는 관행이 있었다. 용산법조브로커 오다리 사건이 <중앙일보> 단독으로 보도되자 다른 언론과 형사과장 황운하는 불편한 관계가 됐다. 그렇다고 황운하가 기자들을 따로 챙기지도 않았다.

 

황운하가 강남서에서 형사과장으로 근무하던 즈음 SBS뉴스가 시청률을 높이려고 사건 보도 비중을 늘리는 편성을 했다. 2003년 6월17일 MBC가 강남 6인조 연쇄납치 강도 사건을 특종 보도한다. SBS는 다음날부터 8시 뉴스로 강남경찰서를 비난하는 기사로 맞대응했다. 경찰은 서둘러 수사책임을 물어 황운하 등을 직위해제했다.

 

경찰 조직은 계급정년제가 있다. 경정에서 총경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경정 14년 차에 경찰을 그만둬야 한다. 황운하는 이후 소청심사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해 경찰청장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 박종희는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이 문제를 따진다. 언론사와 갈등을 해소하려는 무리한 징계라고 지적했다.

 

"그러니까 경찰의 징계가 다분히 감정적이고 이 사건을 호도하려는 의미가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멀쩡한 사람들에게 그런 혐의를 씌워 수사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해 가지고 소청심사위원회에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까지 받았겠습니까?"

 

총경 인사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그러나 경찰청장이 국정감사 지적을 받는 상황에서 경찰청 분위기가 원인 제공자인 황운하에게 호의적일 리 없었다. 그러나 최기문은 황운하를 2004년 총경으로 승진시킨다. 황운하는 훗날 최기문 경찰청장으로부터 승진한 이유를 전해 들었다. 당시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한 참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찰 조직에서 황운하에 대한 평가가 갈리지만 조직에 있어야 된다는 여론이 훨씬 많습니다. 만약 황운하가 총경이 안 돼 조직을 나간다면 경찰 역사에 두고두고 오점을 남기는 청장이 될 것입니다."

황운하를 중용한 첫 경찰청장은 허준영이었다. 그는 청문회에서부터 경찰 수사권 소신을 거듭 밝혔다. 당시 검찰총장인 김종빈이 "검찰이 가진 것은 수사권밖에 없다"고 하자 "경찰은 묵비권밖에 없다"고 받아칠 정도였다. 허준영은 황운하를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으로 불렀다.

 

2005년 12월, 허준영이 물러나자 청와대는 신임 청장으로 이택순을 낙점했다. 2006년 이택순은 바로 황운하를 대전서부서장으로 내보냈다. 인사규정에 따르면 황운하는 서울에서 총경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근무해야 했다. 하지만, 대전중부경찰서장, 대전청 생활안전과장을 지냈다. 당시는 경무관 승진은 서울에서 근무한 총경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임 경찰청장인 어청수, 강희락도 황운하에게 서울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2009년 황운하와 함께 근무한 대전지방경찰청 직원들은 '황운하도 여기서 끝'이라며 안타까워했다.

 

2009년 황운하는 전혀 친분이 없던 서울청장에게 전화를 받는다. 바로 조현오다. 조현오는 황운하에게 서울지방경찰청 과장으로 오라고 부탁했다.

 

 

 

당시 서울청장 조현오가 황운하에게 건넨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경무관 승진 1순위 보직인 서울청 형사과장을 맡기겠다고 한 것이다.

 

대체 조현오는 어떠한 생각으로 이런 제의를 한 것일까? 조현오를 잠시 살펴보자.

  

조현오는 허준영과 마찬가지로 외무고시 출신이다. 외교부에서 10년 근무하다가 1990년 경찰서 과장급인 ‘경정’으로 특별 채용됐다. 조현오는 경찰에 입문한 형사과장 시절부터 성과를 중시했다.

 

 

 

조현오는 관운이 돋보였다. 선배 허준영 덕에 경무관으로 승진하여 외사관리관을 맡는다. 당시 경무관 5대 보직 중 하나다.

 

 

 

 

이어 치안비서실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택순은 청장이 되고 2006년 조현오를 경찰청 경비국장, 즉 치안감으로 승진시켰다. 경비국장은 경찰청 내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매일 오전회의에서 경찰청장을 대면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안가 이택순 청장에게 위기를 안겨준 한화폭행사건이 터졌다.

  

이택순은 자기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전국지휘관회의에서 고위간부(치안감) 다섯 명이 이택순에게 청장 사퇴를 건의했다. 그 명단에는 조현오와 김석기가 있었다.

 

이택순은 황운하를 징계한 것처럼 그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아침 회의 때마다 조현오는 이택순에게 “시저를 찌른 부루터스”라며 면박을 당했다.

 

 

 

 

경찰종합학교장 김석기는 조현오를 위로하곤 했다. 이때 조현오는 김석기와 ‘수사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신뢰가 쌓였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때 김석기는 경찰청장으로 내정됐다가 용산참사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경찰청장 내정자로서 단행한 인사에서 조현오를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승진 발령한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조현오는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으로 청와대를 만족하게 했다.

 

조현오는 2010년 8월 경찰청장에 내정됐다. 하지만, 그 직전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대 내부강연에서 당시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사실이 공개되면서 여론 반대에 부딪혔다. 청문회에서 야당도 거세게 반대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확고했다. 이미 믿고 일을 맡길 사람으로 여겼고 2010년 8월 경찰청장 임명장을 전한다.

 

조현오에 대한 경찰조직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이다. '조 파면'이라는 별명을 거론하며 독재자로 보는 시선이 있지만, 그런 비난에도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카리스마를 칭찬하는 평판도 있다.

 

조현오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은 차명계좌 발언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큰 줄기는 바르게 잡으려고 노력했고 사명을 회피하는 청장은 아니었다는 목소리도 있다.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2008년), 경기지방경찰청장(2009년), 서울지방경찰청장(2010년)을 두루 거쳐 경찰청장이 됐다. 조현오와 역대 다른 청장들과 차이점을 한 기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방청장으로 와서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부류가 있어요. 그런 정책이 인기를 얻으면 차기로 가는 디딤돌이 되지요. 하지만,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다양한 정책을 통해 인기를 얻으려 하지는 않았어요. 그보다 자기 권한으로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겠다는 쪽이었지요.”

 

조현오는 인사 기준은 성과를 따른다는 인식을 안착하고자 했다. 부산, 경기, 서울을 거쳐 경찰청장이 되면서 성과주의를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인사 청탁 금지 지시를 어기고 빽을 쓰려는 직원이 있었다. 부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는 그런 직원을 불러서 조용히 혼을 냈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는 모든 참모들이 참가하는 회의에 불려서 인민재판까지 감행했다.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되자, 인사 청탁 금지 지시를 어기고 빽을 쓰려는 직원은 바로 명단을 공개했다.

 

왜 그랬을까. 조 청장은 서울은 백 ‘수준과 급’이 달랐다고 말했다. 경무관 승진 1순위인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장은 그만큼 보직 경쟁이 치열했다.

 

 

 

 

물론 황운하 경력은 충분했지만 통상 서울청 형사과장 자리는 서울에서 서장을 거쳐야 가능한 보직이었다. 그러나 조현오는 업무능력이 탁월하면 과감하게 등용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수평과 수직 질서를 흔드는 인사였다.

  

형사과장 자리를 제안받은 황운하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저는 서울청 수사과장이나 서울청 광역수사대장을 하고 싶습니다.

당시 서울청 광역수사대가 맡은 대표 사건은 2009년 12월 14일 벌어진 KBS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장 폭행사건이다. 연예인 강병규는 촬영 현장에서 제작진이 이병헌을 고소한 캐나다 동포 여성 배후가 자신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주장하다가 몸싸움을 벌였다. 심지어 조직폭력배까지 동원됐다. 논란이 된 이 사건은 서울청 광역수사대가 2009년 12월 17일 수사를 시작해 2010년 1월 9일, 강병규 등 4명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깔끔하게 처리했다.

 

황운하는 오랫동안 경찰 수사력을 과시하면서 위상을 높일 수사를 하고 싶었다. 서울청 수사과장과 광역수사대는 수사 인력이 풍부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청장은 그 자리에 황운하를 앉히는 것은 힘들다는 견해를 전했다고 한다.

 

결국 황운하가 맡게 된 형사과는 강력계, 폭력계, 과학수사계, 마약계로 나뉜다. 주로 강력범죄와 마약, 폭력사건을 다룬다. 2010년 2월 10일 112신고가 들어왔다.

 

불법오락실을 신고한 사람을 그 오락실 업주가 찾아내 폭행한 사건이었다. 오락실 업자가 신고자를 어떻게 알았을까? 뇌물을 받고 뒤를 봐주는 경찰이 있다는 추정으로 이어졌다.

 

조현오는 자존심 면에서 황운하와 비슷했다. 비리를 도려내 경찰조직을 혁신하겠다는 의지도 분명했다 조현오는 황운하를 불러 오락실 업자와 유착된 경찰관들을 모조리 잡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오락실 업자는 이미 잠적했다.

 

황운하는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청 폭력계 형사들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수사실력이 너무 좋아."

 

(다음 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글쓴이 : 서형 seohyung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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